오색 매표소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일행 중 3인이 울산 바위 쪽으로 가벼운 산행을 한다하여 헤어지고, 8인이 한 팀이 되어 정오가 조금 지나 출발하였다. 9월초이지만 한낮이고, 늦더위의 습한 열기는 금시 목과 등줄기에 땀이 주르륵 흐른다. 오색에서의 오름은 가깝긴 하지만 가파르고 계단이 많아 힘들고 체력 안배가 어려워 초행회원들을 위해서 거북이 마냥 쉬엄쉬엄 가기로 하였다. 당초에는 산행코스를 한계령에서 서북능선을 타고, 끝청으로 대청에 오르기로 하였으나, 지난 태풍 때 피해로 입산 통제되어 계획을 바꾼 것이다.
모두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의기양양하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잘도 올랐다. 두 시간 넘게 오르다, 산등성이 넘어 관터골 비탈길 내려가니 숲속 사이로 계곡 아래에서 물소리 쏴아 하고 한 줄기 시원한 바람이 밀려온다. 설악폭포가 흰 물줄을 내리치며 장관을 이루고 있다. 중간지점에 온 것이다. 모두 배낭을 던지듯 내려놓고, 덥석 주저앉아 발을 담그니 맑고 찬 기운이 온 몸에 전율을 일으킨다. 채1분도 안되어 발이 시리다. 허리띠 풀고 땀에 흠뻑 젖은 셔츠를 입은 채로 훨훨 터니 쌓였던 피로가 폭포 아래로 싹 떨치는 것 같다. 낯선 얼굴들이지만 지인(知人)처럼 바위에 걸터앉아 말을 건네고 밝은 웃음으로 대하니 요산요수(樂山樂水)의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아니겠는가 !
주장이 그 틈에 소주병을 찬물에 식혀서, 육포를 찢어와 한잔을 권하니, 모두 기다렸다는 듯이 출발할 때의 '산행 중 금주의 맹약'을 깨고(?) 사양치 않고 일배들 하니, 폭포 위에서 마시는 짜릿한 그 맛, 그 운치가 견줄 데가 없고, 파안대소하는 모습이 신선도 부럽지 않은 듯하다. 20여분 휴식한 뒤 발길을 재촉하니, 출발! 하고 일제히 일어선다.
가파른 정상의 길은 더욱 경사도를 높이고 계단은 치솟기만 하니 왁자지껄하던 잡담도 어느새 뚝! 그치고 숨소리만 거칠어진다. 선․후미가 제법 벌어진 듯 산등성이에 올라 가쁜 숨을 돌리며 목을 축였다. 오색천길 내려 보니 짙푸른 산록은 철갑을 두른 듯하고, 영산(靈山)의 정기가 서려있는 듯 희뿌연 기운이 감돈다.
쉬는 사이에 주판지세(走坂之勢)로 옆길을 차고 오르는 젊은 산행팀이 있어 넌지시 말을 건네니, 오색에서 정상까지 2시간 반에 주파한다 하니 감탄하지 않을 수 없고, 용기가 부럽기만 하였다. 한참을 가다 숲 사이로 서북능선 끝청의 하늘선이 보이고 햇빛이 뉘엿거리는 잎새 사이로 운무가 앞을 스쳐 날아오른다. 정상이 지척인 듯하여 들뜬 기분에 쉬지 않고 곧장 달리니 다시 한 번 온몸에 땀이 흠뻑 젖는다.
대청에 도착하니 오후 다섯 시가 넘었다. 해가 서편에 걸리는데도 맑은 볕살은 따갑고 눈이 부신다. 전․후미가 좀 뒤처지긴 하였으나 모두 무사히 도착하니 기뻤다. 회원들의 도착일성이 한잔 탓에 힘들었다는 소감(?)에 한바탕 웃으니 땀에 젖은 얼굴에 피로가 걷힌다.
정상은 울긋불긋 천상의 연회장처럼 법석대고, 산행 팀들마다 한 장의 추억을 담고자 표석 주변에 모여 옷매무새 가다듬고 포즈를 취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산자수명(山紫水明)하고 운해(雲海) 찬연한 설악의 정상 1,708m에 우뚝 서니 감회가 새롭고 하늘에 두둥 떠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다. 젊은 청춘의 맥박이 뛰고 모두 하나로 우러러 대청을 찾으니 의연하고 청청하다.
한반도의 중추(中樞), 그 웅자, 그 기세 장엄하고 영원하리라. 북으로 금강․백두요, 남으로 태백․지리․한라까지 달려 내린다.동해 바라보니 검푸른 수평선 위에 권운(새털구름) 길게 펼쳐 붉게 노을 지고, 뭉게구름 찬란하게 두둥실 떠 있다.
산 아래 굽어보니 화채능선은 와룡(臥龍)처럼 길게 화채봉, 칠성봉 뻗어내려 울울창창하고, 운무가득 하니 구름위에 설악이다. 운해(雲海)에 대청의 긴 그림자 드리우니 또 하나의 대청을 내려 보니 신비롭고, 선경(仙境)이 여기 아닌가 싶다. 화채능선에서 염주골로 밀려 내리는 운무는 천상의 폭포처럼 계곡 아래로 쏟아 내리고, 다시 암봉 휘돌아 솟구치고, 흩날으니, 변화무쌍한 비경이요. 설악의 대향연(大響宴)이 아니겠는가.
북벽 내려보니 험상한 죽음의 계곡은 속내를 다 드러내고 기암절벽의 황벽 준봉이 휘끗휘끗 구름사이로 솟아오르니, 기골장건 함에 탄성이 절로 난다. '얼마나 장구(長久)한 인고(忍苦)의 세월 지켜 왔는지!' 계곡은 미궁(迷宮)에 깊어만 진다.
공룡능선은 기암석벽이 솟고 솟아 외설악, 내설악 가르며, 나한봉․마등령 이어지고, 백두대간은 황철봉, 미시령으로 달리면서 금시라도 우레치며 용트림으로 천지를 진동할 것 같은 기운이 감돈다. 외설악은 장엄 웅대한 기상으로 천불동 계곡 굽이치며, 온갖 만물형상을 빚어 놓고, 창해(滄海)의 파수처럼 험난한 파도를 잠재우는 듯하다. 북쪽 멀리 울산바위 날다 장구히 앉아있고, 산록엔 속초 시내가 가물거린다. 내설악은 인자한 어머니 같이 구곡간장(九曲肝腸)의 모든 한을 담아 내리듯 치마폭처럼 주름져 내린다.
가야동 계곡과 소청아래 용아장승릉은 골에 운무를 담고 있어 멀리 백담계곡은 불심(佛心)처럼 깊어만 보인다. 중청 바라보니 서남으로 끝청 이어 내리고 서북능선의 줄기 찬 산세는 남설악 펼치며, 귀때기 청봉, 감투봉 이어내려, 구름위에 산봉우리가 물안개 피는 호수처럼 아름답고, 신선이 와서 노니는 듯하다. 남으로는 한계령 쉬어 내리고, 점봉산이 구름위에 우뚝 솟아 오대산으로 이어 태백으로 달린다.
산, 산, 산 ... 구름, 구름, 구름 ...
푸른 하늘 아래 운해 찬연하니 대자연의 서사시(敍事詩)요!
장엄하게 펼치는 심포니가 아닌가 !
아~ 아름다운 산하, 금수강산이여 길이길이 창성(昌盛)하소서!
모든 것 다 잊고 망부석처럼 섰노라니 석양이 뉘엿뉘엿 구름에 잠긴다. 땀이 식어 찬 기운이 돌아 잠바를 꺼내 입으니 모두들 정상주(頂上酒) 한잔 하자고 한다. 바위에 둘러 앉아 양주로 건배하니 화끈하고, 감개무량하다. 산정에서 구름 내려 보며 들이키는 이 한잔 ! 성취감이요 ! 산의 기다림에 대한 축배이며, 생세지락(生世之樂)의 맛이 아닌가.
중청대피소에서의 1박은 극기(克己)였다. 사전에 예약을 하여 비좁은 자리라도 있으니 다행이다. 저녁 9시에 소등을 하고 땀 냄새 진동하는 가운데 몸을 뒤척이다 밖을 나오니 새벽 2시였다. 평소 볼 수 없는 맑은 하늘은 중천에 은하수 펼치며, 별들이 총총하게 반짝인다. 초저녁에 시끌법석 되던 것과는 달리 적막감이 돈다. 찬이슬에 바람도 찬데 야숙하는 사람들도 많다.
다섯 시가 조금 지나 동해 일출을 보러 대청에 서둘러 올랐으나, 구름에 가려 장관을 보지 못하고, 구름위로 뻗는 서광(曙光)을 받으니 생기가 돈다. 찬란한 아침햇살은 이 땅에 기운을 돋구며 앞날에 번영을 주는 듯 했다. 7시 하산하기로 하여 서둘러 내려와 간단히 라면으로 요기를 하고, 내림길은 여러 의견이 분분하였으나 천불동 계곡 코스로 의견을 모아 출발하였다.
중청을 비껴 소청에 오니 내 설악은 운무가 걷쳐 오르고 용아장성릉은 구곡담 계곡과 가야동 계곡에서 오르는 운무에 용자를 드러내니 빼어나 보이고, 눈 아래 봉정암에는 예불 드리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수렴동 계곡 아래 백담사는 아직 구름 아래 잠겨 있다. 모두 아침 맑은 공기를 가르며 가볍게 산을 오르고 또 내리면서, 서로 길을 양보하고 수고의 인사를 주고받으니 정말 아름답다. 우리 일행은 곧장 달려 회운각 대피소와 양폭산장, 비선대 너럭바위에서 휴식하고 신흥사 입구 금강교를 지나 일주문에서 어제 헤어진 일행과 합류하니 오후 2시였다.
- 대청봉(大靑峰) 푯돌(標石)에 기대서서 -
설악산아 !
그대는 부동(不動)하여도
멈춤이 아니요.
그 기상 창천(蒼天)에 메아리친다.
그대 홀로 있어도
외롭지 않도다.
눈보라 혹한이 휘몰아쳐도
운무(雲霧) 데리고
만고(萬古) 상청하니
그 기개(氣槪) 장하다 !
울울창창에 기암준봉(奇巖峻峰) 높이 솟아
정좌(靜坐)하니
요산(樂山)의 발길, 연연하고
일월성신(日月星辰)의 섭리(燮理)로
한반도의 맥 이어내리니
백두에서 한라까지
그 정기(精氣) 길이 빛나리 ……
짙푸른 동해 바라보며
외쳐본다.
아 ! 대한민국
대청의 푸른 봉은 영원무궁 하리라
註
설악산은 강원도 양양군, 속초시, 인제군에 걸친 백두대간의 중추에 위치한 해발 1,708m의 명산이다. 기암절벽으로 산세가 빼어나 국립공원(398.53㎢, '70.3.24 지정)으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