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낡은 기와지붕 아래 마당에서 어머니, 고모들은 머리를 풀고 빗질을 하곤했다. 주름진 피부와 굽은 허리와 흰머리는 음산하게 귀기마저 풍기는듯하여 피하고 싶었지만 어쩌지 못하고 물을 떠다주거나 빗질을 해주기도 하며 옆에서 시중을 들곤 하였다. 나는 우울한 그러한 세상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일찌감치 멋이나 아름다움과는 벽을 쌓게 된 계기의 하나가 되었다.

마당가에 피는 고운 꽃들이 그늘이 들고 있는 마음에 그나마 화사하게 빛으로 다가오곤 했다. 핏빛을 연상하게 하는 붉은 송이의 파초나 불타는 듯한 선홍의 장미처럼 그런 어두운 분위기 중에도 내게 스며드는 환상이 있었는데 언젠가 꼭 겪게 될 것 같은 필연의 느낌으로 압박하듯이 다가오곤 하는 '영원의 입맞춤'에 대한 환상이었다. 가깝게 밀착되어 떨칠 수 없이 강렬하지만 상상하고는 다르고 현실하고는 동떨어져 그냥 혼자만의 내면에 자리잡은 채 분간하기 어려운 흐릿한 풍경이 되거나 혼란이 되곤 하였다.

그런데도 라푼젤이나 잠자는 숲속의 미녀같은 책을 읽을 때면 나의 이야기처럼, 마치 나의 일처럼 느낌이 생생하였다. 나는 당연히 그 이야기의 책이 무엇보다 좋았다. 해피엔딩의 결말은 희망과 위안이 되었고 말을 하면 다 날아 갈 것 같아서 침묵할 때가 안심이 되곤 할 정도였다

문학이 다양한 장르와 여러 형태로 창의적인 것은 다행한 일이다. 어긋나고 쓸쓸하거나 힘들때면  '삶이 너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는 러시아의 국민시인 푸쉬킨 시의 구절처럼 여러 위로가 있기때문이다. 불유쾌한 상황이나 눈앞에 닥쳐오는 알 수 없는 혼란을 수습하려 오랜 세월을 침묵하며 현실속의 나는 어느새 늙어 나이가 들고 오십대를 지나면서 좌절이 이런 것이구나 싶어지기도 하였다. 

20200321215429_zzihfaiw.jpg나의 마음은 동화속의 꿈꾸는 소녀 라푼젤이고 오로라였지만 현실에서 내가 남자에게 그런 대접을 받은 기억은 찾기도 어렵다. 데이트보다는 도서관에 박혀서 책에 머리를 박은 채 변변한 외출복도 없이 지내던 대학시절이나 틈만 나면 책을 읽고 글을 쓰려고 원고지를 들여다보고 있던 사회생활에서나 공주하고는 먼 분위기였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성에게 허름하고 대충 시간이나 때우려는 부담적은 길거리의 빈대떡같은 취급을 받을 때 그런 현실을 인정하고 수긍하는 것이 정말 힘들었다.

'영혼을 담은 입맞춤'이라고 누군가 쓴 구절을 보았을 때 나는 비로소 나의 오래고 깊은 상처의 흔적을 끄집어내서 살펴 볼 수가 있었다. 문우나 문학의 힘을 빌려 내가 이루고 싶은 아주 작은 나의, 그리고 나만의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다나만의 왕자님, 나만의 꿈, 나만의 세상이 펼쳐질거라고 스스로 위로를 하며 인내한 세월의 단절된 토막들이 잘 맞추어진 퍼즐처럼 선명하게 닥아왔다.

 멋진 풍경속에서 둘만의 사랑을 속삭이고 미래를 약속한다든가, 고가의 외제차를 소유한다든가, 콩알만한 다이아 반지를 선물받는다든가, 명품 브랜드를 쇼핑한다든가 하는 감정의 낭만도 생활의 사치도 또 다른 것도 무관심하게 넘기거나 체념하고 세상과 타협할지라도 문학은 나의 은신처이고 안식처였다.  사회와 거리를 벌려서라도 나만의 시간속에서 고독한 나만의 공간에서 나는 라푼젤이고 오로라일 수 있으니ᆢ 문학을 접하는 고독한 상황이 비록 가난하고 배고프다고 해도 위로가 되었던 것이다.

문득 느낀다. 도시의 고층빌딩과 양옥이 한껏 모양을 자랑하고 환영을 받는데 시골의 낡은 기와지붕아래 마당가에서 유행에서도 한참 쳐진 촌스럽고 구차한 쪽머리의 윤기없이 하얀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길게 풀러 빗질하던 그 주름지고 허름한 모습이 비록 귀기마저 풍기도록 생기없는 외모였을지라도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을.  그 내면에는 곱게 댕기를 땋고 있던 소녀가 아직도 공주처럼 단장을 한 채 꿈을 꾸고 있고,백발이 된 긴 머리를 빗질하며 현실의 상처를 빗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반세기를 살아오는동안 지친 자신을 위로하며 글을 쓰듯이 볕을 쬐며 마당가에 앉아 댕기머리 소녀의 지친 세월을 빗질 하고 있었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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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입맞춤'을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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